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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제자 이야기 6, 빌립
2020-07-19 13:27:09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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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9 대구동산교회 주일오전예배

열두 제자 이야기 6, 빌립

(요한복음 1: 43~46)

 

 

할렐루야!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제자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도 저는 열두 제자 이야기, 빌립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지금 십자가를 지고서 제자의 길을 가고 있는지 아니면, 십자가가 없는 무리의 길을 가고 있는지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얼마 전에 서양 남자들의 이름 가운데 가장 흔한 이름이 무엇인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 이름들은 모두 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름이었는데요, 그 중에서 영광의 1위를 차지한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십니까? 바로 요한(John)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수제자인 베드로보다도 더 요한은 좋아한 이유는 그의 별명이 너무나 멋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별명은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성격이 불같은 요한과 그의 형인 야고보에게 보아너게 즉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요한을 사랑의 사도하고 불렀던 이유는 먼저 그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누구보다도 사랑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역하셨던 당시에 팔레스틴에서 가장 흔한 이름은 요한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보다는 빌립이라는 이름이 훨씬 더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알렉산더 대왕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왕하면 가장 먼저 세종대왕을 떠올립니다. 왜냐하면 세종대왕은 다른 왕들에 비하여 엄청난 업적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 대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B. C 336, 20살 때 마게도니아의 왕으로 즉위하여 33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요즘 같으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갓 대학에 들어갈 약관의 나이였지만, 제국의 영토를 유럽을 넘어서서 아프리카와 심지어 아시아까지 넓혔습니다. 그리고 문화적으로는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탈문화를 융합시킨 헬레니즘 문화를 탄생시켰던 왕이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업적을 남긴 알렉산더 대왕도 대단하지만, 그를 기른 아버지는 얼마나 더 대단하겠습니까? 그 아버지의 이름이 바로 빌립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시에 부모들이 아이를 낳으면, 빌립이라고 이름을 짓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 7집사 중에도 빌립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세례요한을 죽었던 헤롯의 이복동생도 빌립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도 빌립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빌립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이 빌립은 12제자의 명단에는 들어갔지만,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과 같이 핵심 4인방에는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몇 가지 사건을 통하여 그가 어떤 성격의 사람이었는지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이 나옵니다. 그때에 안드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한 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어떤 질문입니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정말 돈으로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물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시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누구에게 했습니까? 돈 맡은 가룟 유다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빌립에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빌립의 성격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매사에 신중하고 치밀한 사람이었습니다. 완벽주의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대답을 했습니까?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 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질문은 즉석에서 대답하기에 결코 쉬운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빈들에 모인 사람의 숫자는 남자 오천 명을 포함하여 여자와 아이까지 합친다면 적어도 만 명이 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먹는 양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마 저에게 질문하셨다면 계산을 하는데 23일쯤 걸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조금도 지체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즉석에서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만큼 빌립은 치밀한 사람이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요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에, 명절을 지키러 온 사람들 가운데 헬라 사람들 몇 명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헬라 사람이란 알렉산더 대왕이 다스리던 그리스 지역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아마도 그들도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소문들을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 뵙기를 소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가운데 빌립을 찾아갔습니다. 왜냐하면 서론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빌립이라는 이름은 전통적인 유대인의 이름은 아니었고, 헬라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좀 더 친근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때에 빌립은 어떻게 행동하였습니까? 아마 성격이 급한 베드로 같았으면, 곧장 그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이러한 사실을 먼저 안드레에게 가서 의논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예수님은 단순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느 유월절 어린양처럼, 세상 죄를 지고 죽으시기 위하여 올라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헬라인을 소개해도 될 런지 몰라서 안드레를 찾아가서 의논을 한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사건은 요한복음 14장에 나옵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에 자주 사용하는 말씀 중의 하나는 요한복음 14:6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이 유일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사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나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백퍼센트 불가능합니다. 마치 높이뛰기 세계기록을 보유한 선수라고 할지라도 달나라까지는 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많은 선을 행하면서 도덕적으로 산다고 하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낙심하거나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내어 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아무리 더러운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기쁜 소식입니다. 따라서 얼마나 제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는 말씀입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에 별로 은혜가 되지 않았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만족이 되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빌립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빌립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직접 보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빌립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다른 제자들의 생각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빌립이 대표로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청을 하는 것을 볼 때, 그는 대충대충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님들은 이러한 빌립의 성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빌립과 같은 사람들은 장점이 많습니다. 따라서 회의를 하거나 일을 추진하다보면 그런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즉흥적인 사람들만 모여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는 한 가지 단점이 있습니다. 결단력이 부족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호의 기회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빌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빌립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빌립을 부를 때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4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만약에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면 그는 결국 고민하다가 세월을 허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자 빌립은 즉각적으로 결단하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4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에게 명령하신 예수님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메시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워낙 변수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들은 무엇을 하든지 신중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실수와 실패를 줄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결단해야 할 때 결단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명령을 하십니다.

 

그 명령 앞에서 너무 신중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빌립처럼 명령하신 분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고서 즉각적으로 결단하고 순종할 때 주님의 제자가 될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요즘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을 하고 계십니까? 그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결론>이제 저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의 신중한 성격을 아시고 명령하셨듯이, 저와 여러분들의 신중한 성격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명령하십니다. 우리에게 명령하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고 빌립처럼 결단하고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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