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20200726 대구동산교회 주일오전예배
“열두 제자 이야기 7, 유다”
(요한복음 14: 22-23)
할렐루야! 제가 중고등부 시절에 여름수련회를 가면, 조별로 성경공부도 하고 성극대회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조별로 모여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조이름을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로 열두 제자 이름으로 조이름을 정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열두 제자들 가운데 가장 인기가 없었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힌트를 드린다면 그는 ‘의심이 많은 제자 도마’였습니다. 그런데 도마보다도 더 인기가 없었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가장 싫어했던 제자는 바로 유다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서양 남자의 이름 가운데 거의 쓰지 않는 이름이 유다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이시기 전까지는 정반대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이름이 유다였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창세기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29장에 보면 야곱의 아내였던 레아가 네 번째 아들을 낳은 후에,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하고 그의 이름을 유다라고 지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유다라는 이름의 뜻은 찬양입니다. 얼마나 멋진 이름입니까?
뿐만 아니라 창세기 44장에 보면, 유다는 요셉의 은잔을 훔쳤다는 누명을 쓴 베냐민 대신에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말한 희생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에 죽기 전에 열 두 아들의 장래에 대하여 예언을 하는데, 유다에게는 놀라운 예언을 하였습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유다의 후손 가운데 온 세상을 다스릴 왕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언은 1차적으로 유다지파에 속한 다윗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됨으로 실현되었습니다. 물론 다윗의 왕조는 B.C 586에 바벨론제국에 의하여 멸망되었습니다만, 2천 년 전에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유다 지파에서 태어나심으로 완전히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당시에 가장 흔한 이름이 유다였습니다. 실제로 신구약 중간시기에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마카비라는 사람의 이름도 유다였고, 예수님이 동생 중에도 신약성경의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무려 두 명의 유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기자들은 동명이인인 두 사람을 구별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노력을 하였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는 가룟 지방의 출신이기 때문에 가룟 유다라고 불렀고, 또 한 명의 유다는 가룟인 아닌 유다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오늘도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유다를 통하여 우리가 지금 십자가를 지고 제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아니면 십자가 없이 무리의 길을 가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먼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 명단을 보면 다대오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아마 이번 코로나사태로 인하여 가장 유명해 진 제자는 이 다대오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천지이단이 우리나라 지역을 12개의 지파로 나누면서 12제자의 이름을 붙였는데 대구지역이 다대오 지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유다는 본명이고, 다대오는 별명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래 다대오라는 말은 ‘도다’라는 말에서 유래가 되었는데요, 도다는 ‘찬양하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유다는 이름 그대로 찬양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별명도 찬양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말씀은 유일하게 오늘 본문, 단 한 곳 데 밖에 없습니다. 먼저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가룟인이 아닌 유다는 예수님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 질문은 예수님의 행동과 관련된 것인데요,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시고, 수많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나타내시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물론 유다는 예수님께서 그 이전에 말씀하신 성령님의 강림에 대하여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만, 그의 질문에서 우리는 유다의 성품을 발견할 수 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의 성품은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축복은 ‘예수님과의 만남과 교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자신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셔서 그들도 예수님을 통하여 참된 안식과 평화를 누렸으면 하는 마음이 유다에게 간절하였던 것입니다. 즉 그에게는 자신을 염려하는 마음보다도 세상을 염려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마음이 곧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이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인 줄 믿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염려로 하루를 시작하고 염려로 하루를 마무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로 누구를 염려합니까? 먼저 나를 염려합니다. 나의 건강을 염려하고 나의 노후를 염려합니다. 그리고 식구들을 염려합니다. 특히 앉으나 서나 자식을 염려합니다. 그러다가 골치 아픈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세상이야 죽이 되 든 밥이 되 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포괄적 차별 금지법이 통과 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동성애자를 통하여 에이즈가 확산되고 있어도 나만 건강하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주님이 세우신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도리어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하나님처럼 예수님처럼 어두운 세상을 염려하였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찬양의 삶입니다. 우리들도 아무리 세상이 더럽고 어둡다고 할지라도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품는 찬양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남해 장사도 이야기, 작은 교회, 1973년 옥부조선생님의 헌신, 83명중 70명교인, 1천번 자재나르기).
다음 두 번째로 가룟 유다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대오 유다는 그의 이름 그대로 찬양의 삶을 살았다면 가룟인 유다는 이름과 정반대로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겉으로 볼 때, 그는 세상을 염려하는 사람 같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유월절 엿새 전에 그는 예수님과 함께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때에 나사로의 동생인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책망을 하였습니다. 얼마나 정의로운 소리입니까? 얼마나 사랑이 넘치는 말입니까?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평소에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가룟 유다야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시면서 칭찬하실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리어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의 본심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진짜 가난한 자를 염려했기 때문이 아니라 돈궤를 맡은 회계로서 돈을 훔쳐가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위선자였습니다.
겉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처럼 아름답게 포장하였지만, 실제로 아름다운 포장지를 뜯고 보면 자신의 욕망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얼마나 포장을 잘했던지 주변 사람들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였습니다. 실제로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제자들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가룟 유다를 째려보면서 의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도대체 누가 예수님을 팔 것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아니지요’라고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염려한 가룟 유다는 어디까지 추락을 합니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는 대제사장들에게 찾아가서 ‘예수를 넘겨주면 얼마나 주겠느냐’고 흥정을 합니다. 그리고 당시에 노예 한 명의 몸값인 은 30에 넘겨주기로 약속을 하고 기회를 노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계실 때에 칼과 뭉치를 무리를 이끌고 예수님을 잡으러 갔습니다.
그때에 유다는 예수님에게 어떻게 행동하였습니까? ‘랍비여 안녕하시옵나이까’하고 입을 맞추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위선적입니까? 그렇다면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동거 동락한 유다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행동할 수 있었을까요? 첫 번째는 돈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6:10에 보면, ‘일만 악의 뿌리는 돈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돈이라는 욕망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탄이 틈탔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먼저 그의 생각을 공격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행동을 말과 행동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악한 생각을 마음에 담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생각만 담아 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할지라도 마귀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우리가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지는 않는지, 그리고 악한 생각을 담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결론>이제 저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염려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염려이고, 또 하나는 마귀를 기쁘게 하는 염려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염려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을 향하여 염려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귀를 기쁘게 하는 염려는 나를 향하여 염려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무엇을 염려하고 있습니까?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세상과 이웃을 염려하여 제자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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