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20200705 대구동산교회 주일오전예배
“열두 제자 이야기5, 요한”
(요한복음 13:21-30)
할렐루야! 오늘도 저는 “열두 제자 이야기, 요한”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과연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무리의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서양남자의 이름 가운데 가장 흔한 이름은 모두 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자기 자녀들이 제자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 같습니다. 먼저 3위는 피터, 베드로이고요, 2위는 제임스, 야고보입니다. 그렇다면 영광의 1위를 차지한 제자는 누구일 것 같습니까? 바로 요한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수제자인 베드로나 첫 번째 순교자인 야고보가 1위를 차지할 것 같은데, 요한이 1위를 차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는 그의 별명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별명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변의 사람들이 별명을 지어줄 때에 그 사람의 장점을 보고 짓는 것이 아니라 단점을 보고 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별명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별명을 너무나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의 별명은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사랑의 사도라고 부른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 번째로 그는 예수님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예수의 제자 중의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고 누웠다.’고 했습니다.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는 달리,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자기 자신을 향하여 세베대의 아들이나 아니면 야고보의 동생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불렀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는 항상 사랑을 외쳤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요한복음과 더불어서 요한 1서, 2서, 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 이렇게 5권의 성경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기록한 성경의 핵심내용은 딱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요한복음 3:16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증거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3:16인데요, 요한일서 3:16에서는 어떻게 말씀하였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성도들을 권면하였습니다. 심지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라는 말씀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말로만 사랑을 외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요한일서 3:18에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직접 실천한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에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여자여 보소서. 당신의 아들이니다.’라고 하면서 누구에게 어머니를 보살피게 하였습니까? 자기 친 동생들도 아니고, 수제자 베드로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에게 맡기셨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가장 돈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이 가장 사랑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요한이 처음부터 그렇게 사랑이 많았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의 아버지인 세베대는 당시 사회에서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과도 잘 알고 지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아빠찬스를 포기하고 예수님 찬스를 택하였던 것은 정치적인 야망을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그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낮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아서 섬김을 받는데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어느 날 요한은 예수님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을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금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요한에‘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요한의 마음은 태평양처럼 넓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절대로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좁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 9장에도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행을 배척하자 예수님에게 어떻게 말씀드렸습니까? ‘우리가 불을 명하여 저 사람을 멸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요한은 남을 사랑하고 돌보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들에게 ‘보아너게’곧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랑보다는 야망에 관심이 많았던 요한이 ‘사랑의 사도‘로 변화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이 지금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느낌은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는 똑같은 예루살렘 채플 안에서 예배를 드립니다만, 어떤 분은 너무 덥다고 느끼는 분이 있고, 반대로 너무 춥다고 느끼는 분도 있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부모의 슬하에서 자랐지만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고 느끼는 자녀가 있는 반면에, 멸시와 천대만 받았다고 느끼는 자녀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어떠했습니까? 그 어떤 제자들보다도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조금 전에 보았던 요한복음 3:16말씀처럼, 죄인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몸을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 끝 날까지 떠나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내가 지금 누리고 있다고 생각할 때 요한은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먼저 야망보다는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하였을 때에 두 사람이 무덤으로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그중의 한 명은 베드로였고, 또 한 명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다른 제자 곧 요한이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베드로보다 요한이 달리기를 더 잘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요한의 마음이 더 컸다는 것을 보여주고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요한복음 21장에서도 발견할 수 가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7명의 제자들이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 호수로 갔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심지어 153마리나 되는 많은 물고기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라.’고 말하였습니까? 역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이처럼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였던 요한은 누구보다도 이웃사랑을 강조하는 사도가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노년에 몸이 너무 약해져서 겨우 앉아서 설교를 하는데요, 매주 똑같은 주제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주제는,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였습니다. 그러자 하루는 제자들이 매주 똑같은 설교를 듣는 것이 지켜워서 ‘선생님 새로운 주제로 설교를 해 주십시오.’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새로운 주제로 설교하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요한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른 사도들은 모두다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만, 유일하게 요한은 순교하지 않았습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그는 90여 살까지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 땅에 가장 오래도록 살게 하는 뜻이 있는 줄 압니다. 그것은 가장 위대한 삶이 어떤 삶인지를 우리에게 오래도록 보여 주시기 위함인 줄 압니다. 가장 위대한 삶은 바로 ‘사랑의 삶’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도요한처럼 이러한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지난 6개월 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였던 코로나19 사태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이렇게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아이들은 학교를 갈 수가 없었고 소상공들은 한숨만 쉬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 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잃은 것도 많지만 더 풍성한 것을 안겨 주실 줄 믿습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은 2020년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지금 우리도 요한처럼 주님에게 귀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만약에 우리가 오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과 은혜를 깨달을 때 사랑의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평생 사랑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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