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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1 설교
2020-02-16 13:29:33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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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6 대구동산교회 주일오전예배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1”

(사도행전 9:1-9)

 

 

할렐루야! 저는 오늘부터 부활주일인 412일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지난 주간에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미국 LA에서 있었습니다. 이 시상식에서 우리나라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 ‘기생충이 작품상을 비롯하여 4관왕을 차지하였습니다(포스터).

 

이 영화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기생충은 한 마리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과 딸 이렇게 네 명으로 구성된 한 가족이 등장합니다. 그 가족은 모두 다 직장이 없는 백수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냄새는 반 지하에 살면서 피자박스를 접는 것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의 친구가 찾아와서 영어과외 자리를 소개해 주면서 재물의 복을 가져다주는 돌이라고 하면서 수석을 선물로 주고 갔습니다. 그날이 이후로 그 가족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전원 백수였던 가족 모두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통해 부잣집에 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심지어 부잣집 주인 가족이 출타를 하였을 때에는 그 가족은 어리어리한 저택에서 파티를 즐기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아들의 친구가 가져다 준 돌이 그 가족에게는 터닝 포인터, 즉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고생 끝, 행복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영화 결말에 보면, 그 가족은 점점 위로 올라갔던 것이 아니라 다시 냄새나는 반 지하로 내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변화산에 올라갔던 베드로처럼 여기가 좋사오니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머물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럭셔리한 집에 살고 있는 부자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뭔가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꿈꾸고 있습니까? 로또 당첨과 사업의 대박을 꿈꾸고 있습니다. 대학 합격통지서와 취업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결혼과 승진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순간이 찾아오면 내 인생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부럽지 않는 삶을 살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기생충 영화에 나오는 그 백수가족처럼, 열심이 올라갔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도리어 더 내려가 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을 정말 행복하게 바꾸어줄 진짜 터닝 포인터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정답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한 사람의 놀라운 변화를 통하여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1절에 사울이라는 사람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갔다고 했습니다. 사울의 이름이 성경에 처음 나온 것은 사도행전 7:56인데요,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 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8:1에 보면,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죽임을 당한 그는 누구입니까?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의 한 명이었던 스데반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산헤드린공회 앞에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을 때에 공회에 모인 사람들이 마음이 찔려서 회개를 한 것이 아니라, 성 밖으로 끌고 가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때에 사울도 그 일을 적극적으로 찬성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 정도로 양이 차지가 않았습니다. 83절에 보면, 아예 이 지구상에서 교회 그 자체를 없애기 위하여 각 집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믿는 남녀들을 끌어다가 옥에 넘겼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울이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대제사장을 찾아가서 공문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약 240키로나 떨어져 있는 다메섹에까지 가서 예수님의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무론하고 결백해서 잡아오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메섹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람왕국의 수도인데요, 오늘날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크스입니다. 현존하는 도시 중에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울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한마디로 열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는 용두사미형의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목표를 향하여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달려갔던 의지와 불굴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의 열심은 잘못된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방향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신의 열심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그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옳은 일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을 비롯한 산헤드린공회원들도 그를 향하여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하면서 뜨거운 박수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잠언 14:12에 보면,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는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지난날들을 돌아볼 때에, 옳지 않은 일을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우겼던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결국 사울의 인생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열심히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낮은 곳을 향하여 열심히 내려가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울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6:14에 보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사실 가시가 달린 막대기를 맨발로 계속해서 찬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차면 찰수록 살이 찢어지고 피가 나지 않겠습니까? 사울이 살아가는 모습이 그러하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입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어리석고 비참한 사울의 인생 앞에 있어서 놀라운 터닝포인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구와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사울이 그토록 미워하고 박해하던 예수님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5절에 보면,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과의 만남을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만약에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송강호씨가 우리교회를 방문한다면 모두들 사인을 받거나 함께 사진을 찍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유명한 배우를 만난다고 할지라도 인생의 터닝포인터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마다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어부였던 베드로의 인생이 달라졌고, 세리장이었던 삭개오의 인생이 달라졌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의 인생까지도 달라졌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울에 보이는 모습이 나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나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의 진짜 모습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비로소 발견하게 됩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높은 보좌에 앉아서 온 세상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송하는 천사들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사야 선지자는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라고 하면서 자신의 더러운 죄를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면서 헌신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로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 찾아오셨을 때에 베드로는 빈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서 어떻게 고백하였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도 예외가 아닙니다. 9절에 보면 사울은 예수님을 향하여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갔던 사울이 도리어 다메섹에 들어가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20절에 보면,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랐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사울이 변화된 이유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사울은 인간적으로 자랑할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자랑이 거룩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딤전 1장에 보면,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고하였습니다. 심지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죄 사함의 은혜가 임하였습니다. 만남과 사귐의 은혜가 임하였습니다. 기도응답의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달라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질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 집사님과 식사를 했습니다. 참으로 많이 변화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이 행복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결론>이제 저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터닝 포인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행복으로 바꾸어 줄 터닝 포인터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임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줄 믿습니다. 마치 박해자 사울이 전도자 바울이 된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의 삶도 새롭게 변화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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