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20180429 대구동산교회 주일오전예배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4”

(빌립보서 4: 5)

 

 

할렐루야! 오늘도 저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관용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관용적인 사람 하면 어떤 사람을 떠오릅니까? 마음이 태평양처럼 넓어서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허물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는 사람을 떠올리게 됩니다. 예를 들면, 지난 주간에 시찰회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월요일 아침에 출발하려고 여러 교회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모였는데요, 그런데 출발시간이 다 되었지만 예약한 버스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날은 새벽부터 돌풍과 함께 많은 비가 내렸기 때문에 짐을 들고 우산을 쓰고서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버스가 도착을 하였을 때에 기사님에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분은 한 분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행동하는 분들을 보고 관용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관용이란 헬라어로 에피에이케스인데요, 단순히 다른 사람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는 행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관용이란 아무리 어렵고 힘들고 억울한 상황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이처럼 내적인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는 성품을 의미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던 스패포드와 같은 사람도 관용적인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재산과 더불어 네 명의 딸을 잃는 고난을 당하였지만 그가 작사한 찬송가 413장의 가사처럼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라고 고백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님과 함께 무려 3년 동안이나 생활하였던 제자들은 별로 관용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그들은 눈앞에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내적인 평온함을 잃어버렸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갈 때에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당황하였습니다.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다급하게 예수님을 깨우면서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을 도저히 구할 수 없는 빈들에서 남자의 숫자만 해도 오천 명이나 되는 큰 무리를 보았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의 마음은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눈앞이 캄캄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겸손하게 문의를 드린 것이 아니라 빨리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라고 건의를 드렸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이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처음에는 불평과 불만을 쏟아 놓다가, 나중에는 머리에 붉은 띠를 띠고서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걱정을 하는 동안에 내적인 평온함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적인 평온함은 풍랑이 이는 갈릴리 호수나 5천 명이 모인 빈들에서만 깨어지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내적 평온함은 사랑하는 부모님이 병이 들어서 입원할 때에도 깨어집니다. 자녀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여도 깨어집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이 아니라 비난을 받을 때에도 깨어집니다. 은행 잔고가 마이너스로 바뀌어도 깨어집니다. 특히 요즘은 체감경기가 너무나 좋지 않다고 하는데요, 일감이 줄어 들 때도 깨어집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내적인 평온함을 깨뜨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모습은 무엇입니까? 상황이 좋은 때 뿐 만 아니라 상황이 최악일 때도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즉 내적 평온함을 계속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었던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기분이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기가 막혔을 것을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예수님을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수많은 박해자과 이단으로 부터 집요하게 공격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재산도 잃었고, 가정도 잃었고, 심지어 목숨도 잃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속이 상하였겠습니까? 그리고 하루, 하루가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하였겠습니까? 따라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내적인 평온함을 유지하면서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너그럽게 용서해 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그 비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 말씀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악인들을 심판하실 날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소망을 가지고 참고 참으라는 뜻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가까이 계시는 분임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높고 높은 저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우리를 이렇게 내려다보시는 분이 절대로 아니십니다. 비록 우리에게는 거룩하신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갈 공로도 없고 자격도 없지만, 우리가 간절히 사모하고 찾을 때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찾아와서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삭에게도 찾아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죽었을 때에 여호수아에게도 찾아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약속하셨습니다.

 

심지어 아버지를 속인 야곱과도 함께 하셨고, 간음한 다윗과도 함께 하셨습니다. 믿음이 약하여진 엘리야와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편 118:6에 보면,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자막)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잊어버렸던 사람을 성경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열왕기하 6장에 나오는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아람의 많은 군사와 병거와 말들이 엘리사 선지자가 머물고 있는 성읍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엘리사 선지자에게 달려가서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사환이 생각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늘 저 멀리에 떨어져 계신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엘리사 선지자가 어떻게 말씀하였습니까?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하였습니다. 실제로 그 사환은 하나님께서 보낸 불 말과 불 병거들의 엘리사 선지자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엘리야 선지자의 사환은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하나님을 찾는 순간 내적인 평온함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빌립보 감옥에 갇혔던 바울과 실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많은 매를 맞은 후에 깊은 감옥에 갇혔음에도 불구하고 한 밤중에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가까이에 계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순간 내적인 평온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을 지켜 본 간수와 그의 가족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조그마한 문제만 만나도 내적인 평온함이 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만을 보여 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문제를 내어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과 지혜와 물질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소년이 소나무 그루터기를 뽑으려고 애를 써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송진이 있는 소나무 그루터기는 벽난로 땔감으로 안성맞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그루터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의 아버지가 소년의 모습을 보면서 너는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구나.’라고 하였습니다.

 

그 순간 소년은 너무나 섭섭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를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너는 아직 내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지 않니? 그게 최선이란다.” 우리들도 최선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찾고 찾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문제들을 만납니다. 그 문제들을 마치 깊이 박힌 나무뿌리와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힘을 써도 뽑을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적인 평온함이 깨어집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뽑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찾고 찾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의 공로나 선생을 의지하고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기를 의지하고 찾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능히 이길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내적인 평온함이 넘치는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