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20180415 대구동산교회 주일오전예배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2”

(시편 32:1-4)

 

 

할렐루야! 지난 주간에는 초속 20미터가 넘는 강풍이 전국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비닐하우스나 간판이 휴지조각처럼 날아갔을 뿐만 아니라 다리 위에 서 있던 1톤짜리 트럭까지 넘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제주도에서는 열기구가 추락하여 조종사가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렇게 강한 바람이 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넘어지지 않고 버티었던 나무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가장 큰 이유는 튼튼한 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강풍이 불때,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큰 나무든 작은 나무든 다 흔들립니다. 그런데 뿌리가 튼튼한 나무는 절대로 넘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에 따스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그런 바람만 불어온다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그런데 때로는 초속 20미터보다도 강력한 바람이 불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때가 있습니다. 그 바람의 이름은 염려의 바람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염려하신 것 중에 특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을 하셨는데요, 그 이유는 염려의 바람이 한 번 불면 너무나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버리기 때문입니다. 먼저 염려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평강과 기쁨과 소망을 짖밟아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심히 불편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염려는 우리의 소중한 건강마저도 빼앗아 갑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염려의 바람은 언제 불어옵니까? 우리가 딱 한마디의 말만 내 뱉으면, 아니 생각만 해도 불어옵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기억나십니까? 어쩌지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내가 암이 걸리면 어쩌지, 우리 자녀가 취업을 못하면 어쩌지, 사업이 망하면 어쩌지 하는 순간 염려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지었습니다. 그 후에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두 사람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시겠지요? 그들은 두렵고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 먹으면 이전 보다도 더 행복하여 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콘크리트 덩어리보다 더 무거운 죄책감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지으면 순간적으로는 쾌락을 느끼지만, 그 이후로는 계속해서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우리에게 두 가지의 소리를 계속해서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하나는 너는 나쁜 짓을 하였다.” 또 하나는 너는 나쁜 사람이다.”

 

아담과 하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도 이러한 소리가 들려왔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어쩌지”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나를 사랑해 주시지 않으면 어쩌지, 더 이상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어쩌지, 더 이상 도와주시지 않으면 어쩌지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담과 하와에게 염려의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결국 염려의 뿌리는 궁극적으로 죄책감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다음에 찾아온 것은 행복감이나 성취감이 아니라 죄책감이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어떻게 고백하였습니까? 먼저 1절과 2절에 보면, 다윗은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아파트나 로또에 당첨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와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직접 엄청난 죄책감에 짓눌려 보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3절에 보면, ‘내 뼈가 쇠하였도다.’고 했습니다. 특히 4절에 보면,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책감이 주는 고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책감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따라다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염려입니다. 따라서 다윗도 역시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나를 인도하여 주시지 않으면 어쩌지하는 순간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은 염려라는 짐승에게 잡아먹히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염려라는 바람에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염려에 대하여 승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이러한 염려를 어떻게 이길 수 있었습니까?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였다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자복하지 않았는데, 다윗은 자복하였습니다.

 

그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다윗에게는 나의 죄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즉 은혜의 무게감이 달랐습니다. 저울 위에 한 쪽에는 나의 모든 죄를 올려놓고 다른 한쪽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올려놓았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 쪽으로 기운다는 사실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다윗에게서 사라졌을까요? 죄책감과 함께 염려가 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시지 않고 사랑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나를 인도해 주시고,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확신을 사도바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누구보다도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8:1에 보면, 그는 스데반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던 사람입니다. 돌에 맞아 죽어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3절에 보면,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믿는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던 사람입니다. 그것도 부족하여 다메섹까지 가서 믿는 자들을 핍박을 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지은 죄는 여기서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더 큰 죄가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는 죄였습니다. 즉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구제하면 내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죄를 범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사도바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누구보다도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염려의 삶을 살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는 로마 감옥에 갇혀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심히 연약한 가운데 있었지만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노라.’고 고배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의 죄보다도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는 사실을 믿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죄책감과 함께 염려도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1:18).”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모든 사람들이 다윗처럼, 사도바울처럼 죄책감과 염려를 가지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 가지 인간적인 방법으로 죄책감을 없애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쾌락 형이 있습니다. 이들은 죄책감이 주는 고통을 잊기 위해서 술이나 도박이나 외도와 같은 방법으로 쾌락을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쾌락의 시간이 끝이 나면 죄책감이 주는 고통과 염려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커져 있습니다.

 

두 번째는 오리발 형이 있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죄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변명하거나 정당화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실수나 관행이라는 이유로 무마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는 선행 형이 있습니다. 이들은 죄를 지은 만큼 선을 행하면 죄책감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 기도하고, 더 성경 읽고, 더 전도를 하고 더 구제하면 죄책감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바라보면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 밖에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이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커스 공연장에 가면 공중에서 멋지게 곡예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곡예사들에게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곡예사는 말하기를,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비결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즉 나를 붙잡아 주는 사람을 향하여 팔을 길게 뻗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나의 팔을 안전하게 붙잡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그 사람을 잡으려고 노력을 하면 둘 다 땅에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결론>이제 저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항상 기뻐하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즉 염려의 바람이 아무리 강하게 불어도 넘어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책감입니다. 죄를 지으면 죄책감이 찾아오고, 죄책감이 있으면 염려는 저절로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책감을 십자가 앞으로 가지고 나아가면 죄책감과 더불어 모든 염려가 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은 죄보다도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서 염려를 이기는 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