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20180304 대구동산교회 주일오전예배

예수, 예수 4”

(누가복음 10: 25-37)

 

 

할렐루야! 오늘은 사순절 기간 중 세 번째 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예수, 예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제가 중, 고등학생 시절에 교회에서 여름수련회를 가면, 매번 성극대회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조별로 모여서 누가 아브라함의 역을 맡을 것인지, 누가 지나가는 동네사람을 맡을 것인지 배역을 정한 다음에, 즉석에서 대본도 외우고, 분장도 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학생들에게 제일 인기가 있었던 성극소재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탕자의 비유못지않게 성극에 자주 등장했던 비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물론 이 비유는 다른 비유들처럼 실제로 있었던 실화는 아닙니다만,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심지어 우리 성도님들은 제가 설교시간 때, ‘선한 사마라고만 해도 아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겠구나.’하고 감을 잡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 비유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교훈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순절 기간 중에 이 비유의 말씀을 설교 본문으로 선택한 이유는 이 비유가 단순히 이웃을 사랑하라는 교훈을 넘어서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를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지 그 배경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25절에 보면,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서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율법사는 구약에 나오는 모세의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그들을 서기관이라고 하는데요, 한마디로 율법박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어떤 질문을 하였습니까?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지금 율법사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영생 곧 하나님 나라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지를 예수님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우리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한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은 영생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는 것도 복되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도 복된 일이지만 가장 큰 축복은 죽어서 지옥가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가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4장에도 보면,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까?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그런데 우리는 부자청년이나 율법사의 질문을 통해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실적주의에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적주의란 사람이 이 땅에서 실적을 많이 쌓으면 그 상급으로 하나님께 영생을 얻을 수 있지만, 실적이 부족하면 그 벌로 지옥형벌을 받는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이 무엇을 열심히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예수님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을 하셨습니까? 26절에 보면, 지금 예수님은 시원하게 대답을 해 주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사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어떤 질문을 했습니까?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구약에 나오는 두 개의 말씀으로 대답을 하였습니다. 하나는 신명기 6장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레위기 19장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러한 율법사의 대답에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28절을 보면,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율법사의 대답을 옳다고 인정을 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다 지켜 행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율법사나 부자청년은 모르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무엇을 모르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즉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로마서 3:10에 보면, 사도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23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도바울 같은 인물조차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율법사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만만하였습니다. 특히 이웃을 사랑하는 일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29절에서 예수님에게 어떻게 질문을 합니까?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사실 율법사는 자신이 사랑해야 하는 이웃이 누구인지 몰라서 질문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벌써 그는 자신의 이웃을 누구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웃은 먼저는 가족이었습니다. 다음은 친척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율법사는 이러한 사람들을 오래 전부터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영생을 얻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실 때 율법사의 생각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들여 주신 이야기가 바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그 내용은 너무나 쉽고 간단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내려오던 제사장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는 순간 못 본 척하고 지나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역시 성전에서 봉사를 하는 레위인이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역시 그냥 지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두 사람 때문에 오늘날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생겨난 귀한 법이 있습니다. 어떤 법이냐 하면, 이 두 사람처럼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조하지 않고 그냥 외면한 사람에게는 징역이나 벌금을 부과하는 법입니다. 이 법 이름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 법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사마리안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혈통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순수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처럼 취급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화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행동하였습니까? 예상과는 달리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서 치료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짐승에 태워서 주막에 데려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튿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면서 돌보아 주라고 부탁합니다. 치료비가 더 들면 돌아올 때에 갚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비유를 들여 주신 다음에 예수님은 자신만만하게 생각하던 율법사에게 두 번째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36절에 보면,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을 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29절에서 누가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말한 율법사의 질문과 36절에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먼저 율법사는 자신이 사랑해야 하는 이웃의 범위를 정해 놓은 다음에 질문을 하였다면, 예수님은 그 범위를 무너뜨리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인종이나 성별이나 종교나 빈부귀천을 따지지 말고 무조건적으로 네 몸과 같이 사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37절에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라는 한 번만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계속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정치인의 봉사).

 

이러한 비유의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누구를 떠올릴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목적지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9:51을 보시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목적지로 정해 놓고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목적은 단 한가지였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영적으로 강도 만나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상태는 거의 죽은 것이 아니라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죄인들을 살리는 방법은 오직 하나 뿐이었습니다. 바로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러했듯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비유는 단순히 이웃을 사랑하라는 교훈만 주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얼마나 크고 귀한 지를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결론>이제 저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예수님은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사랑과 은혜를 생각할 때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